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산업경쟁력 강화 실패와 중동형 경제 ====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와는 반대로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거나 [[벼랑 끝 전술]]을 하지 않고, 미국과의 갈등 완화를 위해 데탕트를 실행하여 과거 [[핵전쟁]] 위기가 만연했던 흐루쇼프 시대보다 훨씬 평화로워졌으며, 비록 군사력의 증강으로 국방비가 [[GNP]]의 12%를 넘었으나, 그렇다고 미국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서방 국가와의 무역 또한 늘어났다.[* 실제로 [[펩시]]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이 이 시기에 소련에 [[https://news.joins.com/article/1334923|진출]]하기도 했으며, 소련TV에 상업광고가 등장한 때였기도 했다. 이때 상업광고가 도입된 김에 소련 기업들에게 회사자금의 1%를 광고비로 쓰라는 지시도 내렸기 때문에 소련의 광고시장이 팽창하기는 했으나 저급 제품들이나 심지어 제대로 생산되지도 않은 제품들도 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에게 '광고는 저급한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래서 광고 효과는 떨어졌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 것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 시기에 와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의 상당수는 소련의 석유나 각종 자원을 서방의 완제품과 소비재로 교환하는 것이라서, 전형적인 후진국형 무역 구조였다. 무엇보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은 대대적인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손쉬운 자원팔이로 경제를 운영하다 보니 나중에 가면 소련 제조업의 경쟁력은 서방보다 점점 떨어졌고, 이는 양과 질 모두 형편없는 소비재라는 결과로 돌아와 인민들의 불만을 불렀다. 특히 서방과의 무역을 통해 들여온 질 좋은 수입산 소비재와의 비교가 이런 위화감을 부채질했다고 한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고유가 시대에서 1980년대 말 저유가 시대가 되자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는 박살이 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소련 해체|소련의 해체]]를 불렀다. 그리고 이는 2020년대인 현재에 와서도 [[러시아]]가 중동형 경제로 굴러가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훗날 그렇게 될 줄 소련 내에서 아무도 몰랐고, 그저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소련의 소비재의 질이 어느정도였냐면 겨우 [[최빈국]]에서 벗어난 [[개발도상국]]에 불과했던 당시의 한국이 1970년대 초 부터 [[트랜지스터]]를 활용하는 텔레비전을 내놓았을 때 소련은 여전히 [[진공관]]을 사용하는 텔레비전이 많았었다.[* 소련제 진공관이 자주 폭발하여, 소련 내에서는 TV를 보다가 TV가 폭발해 사망하는 사건도 많았다.] 게다가 [[라다 쥐굴리]] 같은 승용차를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으면 이후 차량을 수령하기까지 몇 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었다. [[노멘클라투라]]와 같은 공산당 고위간부들은 서방제 소비재를 즐기고 있었다. 이외에도 흐루쇼프 시대부터 준비하던 코시긴 - 리베르만 개혁을 단행해 경제 체제 전반을 개선하려 했으나, 커다란 성과 만큼이나 부작용도 심각해서 개혁을 추진한지 5년이 되는 1970년에 중단해 버렸다. 1970년대 들어서는 경제성장률이 5~6% 안팎에서 3%로 급속히 저하되었고, 관료제의 폐해가 적나라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 관료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바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된다. 소련은 스탈린 치하에서 1930년대 신화적인 공업화를 이뤄냈고, 1940년대는 [[독소전쟁]] 승리를 거두었으며, 1950년대는 전후복구로 아주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1960년대까지도 경제성장률이 5~6%대로 어느정도 나왔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점차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소련 내에서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데 저항이 심했다. 흐루쇼프는 소련 지배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적인 정치[* 흐루쇼프의 개혁보다는 농업 실패와 대외정책이 결정적이었다.]를 하다가 결국 지도층의 반발을 사서 실각했고,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예를 봐서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전면적인 개혁을 하는데는 흐루쇼프라는 [[반면교사]]가 큰 걸림돌이었다. 그나마 브레즈네프 재임 초기인 1960년대에는 어느정도 성장률이 유지되었지만 1970년대 들어서는 성장률이 급속히 하락하여 3% 안팎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소련시민들의 구매력은 높아지기는 했지만 지하경제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고한 경제개혁안은 계획되어있기는 했지만 이보다 쉬운 길이 갑자기 열렸으니 그것은 바로 1970년대 초반에 일어난 [[오일 쇼크]]였다. 브레즈네프는 오일 쇼크 때 소련이 풍부하게 가지고 있던 자원, 즉 석유에 주목했다. 그래서 자원을 서방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인민의 복지를 향상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보다는 쉬운 길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소련에 독이 되어 [[자원의 저주]]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은 기술이나 교육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더 나은 길이 있었지만, 이념적 경직성 및 쉬운 길로만 가다보니 이렇게 제조업을 등한시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소련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원의 저주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영국같은 경우도 북해 유전이 터지면서 제조업이 다 박살난 것을 보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영국은 금융이라는 세계 최고 경쟁력의 산업이 있었지만 소련은 그게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브레즈네프의 전성기인 1970년대는 고유가 때문에 소련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고 인민의 삶도 서방 국가들에 맞먹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이때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우호성 무역도 활발해서, 당시 북한에서 헝가리산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던 '좋은 시절'이었다는 회고담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앞으로의 파국을 내재한 풍요로움이라는 점에서 '''[[청나라]]의 [[건륭제]] 말기가 연상될 정도로 상당히 비슷한 시대였다.''' 어쨌든 고유가 때문에 이렇게 경제를 꾸리는 것은 쉽고도 좋은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도 마찬가지 문제였고, 저유가 시절인 1980-90년대, 2010년대 내내 침체를 하다가 고유가가 된 2000년대, 2020년대 갑자기 경제가 좋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사망한 이후 1980년대 들어 [[3저호황|유가가 떨어지던 시기]]가 되면서 유가로 경제를 꾸리던 소련경제는 위기에 접어 드는데, 이 시기를 맡은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들 세 명이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소련의 불운이었다.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는 건강이 문제가 있어서 최고권좌에 앉은지 1,2년만에 단명해 개혁은 엄두도 못냈고, 마지막으로는 방향은 옳았을지 몰라도 당 장악력이나 리더십에 문제가 있던 고르바초프가 최고 권좌에 올라서[* 취임할 때 54세였는데, 젊은 리더십을 펴기는커녕 원래부터 안드로포프의 총애 때문에 고속 출세한 인물이라서 능력에 비해 리더십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정치국 위원들은 많게는 고르바초프보다 20살 이상이나 연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임기 초반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영전했다가 1988년에 은퇴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09년생이었다. 이런 원로들 앞에서 그의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개혁을 추진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있었던 리더십 공백 또한 소련의 불운이라고 할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